첫사랑에 들다

작성자 두류실
작성일 12-04-02 13:24 | 2,862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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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아침. 지리산 삼도봉 인근에서 만난 골안개(2005)]
 
얼마 전, HK인문한국사업 중 '지리산의 역사문화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지리산권문화연구단(순천대, 경상대 공동)에서 '지리산인IN' 이라는 격월간지의 '지리산 사람'이라는 틀에 넣을 글이 필요하다고 해서 짧은 글을 보냈습니다.
 
마침 오늘 글이 실린 간행물이 도착하였기에, 민망한 글입니다만 여러님들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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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들다.

지난 주 지리산 둘레길 남원 운봉-주천 구간을 걸었다. 느린 걸음으로 지리산 산줄기를 바라보며 걷는 일은 늘 몸과 마음을 달뜨게 한다. 아직도 녹지 않고 희끗하게 보이는 바래봉의 눈 때문일까, 대기는 아직도 알싸하다. 하지만 산자락과 들녘, 그리고 람천 뚝방길 곳곳에서 시작된 은밀한 움직임은 속도를 더하고 있다. 아직 발을 떼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 겨울과 수목들의 새순들이 눈을 틔우며 빨리 오라고 재촉한 봄이 어우러진 이 시절은 하늘과 땅이 늘 분주한 모습이다. 모진 겨울을 잘 견뎌낸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격려의 인사 보낸다. 그리고 늘 그러하였듯 지나간 봄날의 희망들을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추슬러본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는 선배들의 꼬임에 빠져 지리산을 처음 만나게 된 지 36년이 지났다. 여기서 ‘꼬임’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이러하다. 1975년 겨울, 약관의 나이로 건장한 청년이던 나는, 지리산 천왕봉 등정에 필요한 포터를 물색하고 있던 선배들에게 찜을 당하였고, 그들의 자비로운 막걸리 보시에 감격한 나머지 시키는 대로 ‘선서‘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산과의 첫 만남은 내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칼바위에 닿기도 전에 이미 휘어져버려 나를 허둥거리게 만든 아이젠, 능선을 오르자 버려진 초막처럼 을씨년스럽게 서있던 법계사, 그리고 정상에 이르기 직전 마지막 오름에 목숨을 걸다시피 엉금엉금 기어오르며 느꼈던 공포의 순간들, 등정의 기쁨에 들떠있던 선배들과는 달리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의 모습 등은 오랜 시간이 흐르긴 해도 아직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단상들이다. 산을 내려온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동안을 지리산에서의 기억으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의 재회를 다짐하게 된 것이다. 나의 지리산 사랑은 20대를 시작하던 겨울날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사랑과의 첫 만남 후 나는 꾸준히 지리산 산자락을 찾곤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제법 긴 시간이 흐른 1997년 겨울, 불혹을 맞이하며 천왕봉을 오른 때였다. 늘 오르던 그 곳에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상에 오르자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답답함, 우울함, 그리고 시절이 주는 고단함에 지쳐있던 내게 지리산, 아니 첫사랑은 그렇게 나를 위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나의 지독한 지리산 사랑은 다시 시작되었고 다행히 그 사랑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치밭목의 농밀한 신갈나무 숲에서는 ‘나 자신을 사랑하자’며 노래를 불렀고, 구재봉의 숲길에서 만난 풀꽃들과는 황홀한 교감을 나누며 행복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주능선 형제봉을 지날 때는 등 돌리며 앉아있는 바위의 볼쌍 사나운 꼴을 시인의 노래와 함께 나무라기도 했다. 그렇게 골짜기와 산줄기에 나의 촉수와 발자욱을 남기는 사이 나의 성급한 지천명이 다가왔다.

사랑을 무슨 이유나 목적을 달아 설명할 수 없듯, 새로운 나의 삶의 터전을 모색하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온 지 4년이 흘렀다. 이제 이순(耳順)의 날도 멀지 않았다. 산길과 높이만 추구하던 지리산 산꾼으로서의 사랑을 이제 산자락과 동화되는 지리산 사람의 삶으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담(愚潭) 선생의 『산중일기』가 여전히 나와 동행하고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위하여 지리산으로 찾아든 그 이는 나에게 또 다른 삶의 희망을 보여주었고, 나를 늘 깨어있게 하여주기 때문이다. 

지리산 둘레길 주천면 구룡치를 잇는 아름다운 솔숲으로 들어섰다. 폭신한 솔가리를 밟는 걸음은 붕 떠다니는 듯 황홀하다. 무엇을 빌 냥인 듯 사무락다무락 돌담 옆 소망나무 앞에 나는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老시인의 절절한 외침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길을 걸어야한다” 
 
2001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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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섭
전북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거주(부산출신/1956년생/2008년 귀농)
동아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75학번)/순천대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수료(2010년)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2006~2008)
지리산두류실 대표/영농조합법인 남원에서 왔어요 대표이사
서울신문 ‘조용섭의 산으路’ 연재(2004-2006)
중앙일보(조인스닷컴) 파워블로그 ‘지리산 숲향을 그리며’ 운영자
(
http://blog.joins.com/choys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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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

이오님의 댓글

이오
<DIV>형님!! 좋은 글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벌써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네요... 그시절이 엊그제 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죠... 조만간 서울에서든 기회가 된다면 두류실에서 막걸리 한사발 하시죠.. 감사합니다.. --엄원간 올림--</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