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08)지리산과 불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54 | 1,869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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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지리산(9)지리산과 불교사상
화엄종 → 선종 → 조계종


지리산은 능선을 기준으로 남쪽면은 겉지리, 북사면은 속지리로 나누어진다. 속지리쪽은 주로 산신·정감록 등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이 많은 반면 겉지리쪽은 불교신앙이 주를 이룬다. 겉지리 사찰을 눈여겨보면 한국불교의 흐름이 능선처럼 엮어진다.
구례 화엄사에 다다르면 신라중대 화엄사상을 알 수 있고 남원 실상사, 구례 연곡사를 거치면 선종의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산청 단속사는 고려후기 조계종의 흔적이 묻어있다.

  191153-2-152563.jpg  ▲ 승려의 사리가 모셔진 실상사 북부도.△구례 화엄사가 부석사에 가려진 까닭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화엄사상을 잘 표현한 연기대사의 세계관이다. 모든 존재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생사 한다는 화(和) 사상이다. 이런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은 부석사와 화엄사.

하지만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에 비해 화엄사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기대사라는 인물에 대한 명확한 근거 기록이 없어 인도인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전설적 인물로 치부되기까지 했다.

1979년 신라 화엄사경이 발견됐다. 누가 어떻게 사경을 썼다는 발문이 나오면서 화엄사의 창건자인 연기대사의 실체와 사찰의 연대가 명확해졌다.

이에 따라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 동오층석탑(보물 132), 서오층석탑(보물 133), 원통전전사자탑(보물 300)은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경덕왕 시절의 작품들로 가장 세련된 불교미술의 상징들로 떠오르게 됐다.

그럼 왜 화엄사는 일찍부터 부각되지 못한 것일까. 후삼국시대. 불교교단이 분열하면서 화엄종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견훤을 중심으로 하는 남학파(전남 구례 화엄사)와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북학파(경북 영주 부석사)로 나눠진다. 고려가 세워지면서 자연히 고려를 지지했던 북학파는 역사가 됐고 남학파는 뒤안길로 묻혔던 것이다.

능선따라 흐르는 한국불교

△선종의 핏줄 실상사, 연곡사

실천불교라 불리는 선종. 인도의 화엄경이 중국으로 건너와 화엄종이 됐듯이 인도의 선 수행 종파는 중국을 거쳐 선종이 된다.

인도의 전통수행법인 ‘비구(생산활동은 안하고 최소한의 양만 빌어서 먹음)’는 중국의 현실 중심적인 사상과 겸해지면서 이상도 현실에서 찾는 실천적 종교인 선종으로 자리잡는다. 선 수행 의미도 확대될 대로 확대돼 생산활동까지도 선이 되고 승려도 농사를 짓게 된다.

선종은 승려의 깨달음이 목적이다. 그래서 선종 사찰을 둘러보면 부처를 모시는 불전의 비중은 줄고 승려들이 수행하는 강당은 두각을 나타낸다. 그 대표적인 사찰이 전북 남원의 실상사다. 928년 신라말 9산 선문 중 최초 선문으로 왕실지원 아래 세워져 9세기 이후 유물들이 가득하다.

선종하면 승려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빼놓을 수 있으랴. 구례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구례 연곡사에는 동부도(국보 제53호)·서부도(보물 제154호) 등 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초까지 빛을 발했던 팔각원당형 부도들이 곳곳에 모셔져 있다.

△고려후기 막강한 영향력 가졌던 단속사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당간지주만 터를 지키고 있는 단속사. 현재 휑하니 바람이 이는 이곳은 고려후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계종 사찰이었다.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했던 고려후기. 교선일치를 역설하며 화엄종 출신 승려 의천이 선종을 끌어들여 천태종을 개창한다. 당시 끝까지 선종을 주장한 승려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만든 것이 조계종이다.

고려후기 최씨 집권기에 최우가 조계종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만종을 단속사 주지로, 만전을 화순 쌍봉사 주지로 보낸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들은 재산을 착취하고 고리대도 일삼는 등 백성을 괴롭혔다고 전한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고 했던가. 속됨을 끊겠다는 의미의 단속사도 인간의 어리석음은 영원히 고칠 수 없었는가 보다.

도움말/최병헌(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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