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06)선사 문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53 | 2,225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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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지리산(6)남강 유역의 선사문화
천혜의 자연 속 풍요 누리던 청동기 대평인들


산은 인류 문명의 모태다. 인류 문명이 강에서 비롯되었다면 강은 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산을 내려와 낙동강과 만나는 남강은 선사시대를 대변하는 도시형성의 요람이었다. 남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해 함양군·산청군을 지나 진주시에서 지류인 덕천강과 합류하고, 의령군과 함안군을 지나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남강 상류부에서는 전북 남원시 아영분지와 남원시 운봉면·산내면·함양군 마천면의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하천들과 합류한다.

    ▲ 진주 북동쪽 대평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밭고랑. 갑자기 사라져 물 밑서 말이 없고

그 중 남강 상류부인 진주 북동쪽 대평은 지금은 비록 하나의 촌락이지만 선사시대엔 무척 번창한 도시였다.

이곳은 ‘들췄다 하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많은 선사시대 유적들이 발견됐는데 특히 1990년대 후반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삼한시대·삼국시대 유적이 발견돼 ‘선사시대 생활상의 보고’라고 불렸다.

대규모 주거지와 환호(둥글게 경계를 만들어서 외부침입을 막는 마을형태)를 비롯해 밭고랑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속에 반달돌칼·돌도끼·돌낫·돌보습·돌괭이 등 경작용 연장이 나왔고 일상적인 먹거리인 조·콩·쌀·참깨·수수 등 곡물이 불탄 채 출토됐다. 당시 청동기 농경에 대한 근거는 곡물이나 농기구에 국한됐을 뿐 직접적인 물증인 밭은 나오지 않았던 터라 당시‘역사를 바꾼 발굴’이었다.

     1만평 광활한 밭·400동 넘는 움집 등

그들의 생활상을 상상해보면 이러하다. 대평의 청동기인들은 3000여 년 전 진주 대평 들에서 도시를 이뤘다. 1만평이 넘는 광활한 밭을 일궜고 400동이 넘는 움집에서 수천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돌과 토기·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집단도 존재했다. 밭이나 환호 같은 시설물은 대규모 노동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청동기시대 대평 지역이 수장을 중심으로 결속해 성장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럼, 대평이 당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환경·지형·토양 등 모든 여건이 풍족해 최적의 농지로 꼽히는 대평리. 청동기때도 대평은 농사짓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남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모래질의 좋은 흙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지리산 핏줄 받은 ‘청동기 혁명의 역사’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남은 것은 따로 비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평은 매우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근처에서 찾은 옥돌로 장신구를 생산하는 등 수공업도 발달했다. 그래서 곡물과 옥 등 생산물을 멀리 떨어진 해안지역이나 산간지역과 교역도 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평화를 누렸던 대평리 청동기인들. 그런데 대평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청동기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 많았던 유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하더라도 정복자 집단이 천혜의 땅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는 만무하다.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남은 것은 따로 비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평은 매우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근처에서 찾은 옥돌로 장신구를 생산하는 등 수공업도 발달했다. 그래서 곡물과 옥 등 생산물을 멀리 떨어진 해안지역이나 산간지역과 교역도 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천혜의 자연 속에 평화를 누렸던 대평리 청동기인들. 그런데 대평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청동기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 많았던 유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하더라도 정복자 집단이 천혜의 땅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는 만무하다.
     
자연 수몰돼 고고학적 궁금증만 남아

자연재해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게 아쉬움이 남은 채로 대평 상촌 일대는 자연상태로 수몰됐고 대평 충적지인 본래의 옥방 마을과 어은 마을이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대평 유적지는 오랜시간을 두고 발굴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수몰된 게 아쉽다”며 “일본의 경우 몇십년에 걸쳐 유적발굴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조건상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대평인들은 갑자기 사라졌을까? 수몰된 저 속에 무엇이 있을까? 대평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조사되지 못한 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자연재해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게 아쉬움이 남은 채로 대평 상촌 일대는 자연상태로 수몰됐고 대평 충적지인 본래의 옥방 마을과 어은 마을이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대평 유적지는 오랜시간을 두고 발굴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수몰된 게 아쉽다”며 “일본의 경우 몇십년에 걸쳐 유적발굴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조건상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대평인들은 갑자기 사라졌을까? 수몰된 저 속에 무엇이 있을까? 대평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조사되지 못한 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도움말·사진/경남대 인문학부 이상길 교수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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