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05)지리산의 고인돌 문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53 | 1,928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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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지리산(5)지리산의 고인돌문화
외형은 각양각색 혼령은 영혼불멸


지난 4월 전남 화순 고인돌 축제에서 선사인이 다시 살아났다. 선사인 10여명이 채석장에서 캐낸 수백㎏에 달하는 거대한 돌을 직접 옮겼다. 고인돌을 만드는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자연환경은 생사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따라서 인간보다 오래도록 잔존하고 있는 거목이나 거석을 항상 우러러봤다.

   
 
▲ 구례 봉서리 고인돌
 
그 중에 견고한 거석은 불멸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시 고인돌은 죽은 이의 혼령이 안식하는 곳이자 죽은 이의 혼령이 끼칠지도 모를 위해로부터 살아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동북아시아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우리나라에 약 3만6000여 기로 세계적으로 밀집도가 가장 높다.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약 2만여 기, 영남지방에 4800여 기가 분포해 지리산 주변 일대보다는 남해안 반도지역에 고인돌이 밀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남을 중심으로 인접지역인 전북·경남·전북지역이 고인돌 유적 수의 84.5%를 차지한다.

    ▲ 마산 진동 유적 경남지역 유적 대부분 지리산 동쪽에 밀집

경남지역에서 확인된 고인돌 유적수는 2004년 11월 현재 대략 412개소인데, 이중 지리산 주변인 산청과 하동, 함양, 남해, 진주, 사천에는 150개소에 약 500여 기가 알려져 있다. 고인돌 밀집 분포지역도 전남은 여수반도 등 남해안에 몰려 있으나 경남은 남해안보다 지리산 동쪽에 더 밀집돼 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그래서 선조들이 부르는 고인돌 별칭도 다양했다. 자연석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독바우, 바둑판식 고인돌은 괸바우라 불렀다.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명칭도 다양했는데 지리산인근 구릉지에도 거북 형상을 한 고인돌이 있다. 전남 구례 중학교와 구례군청에서 남동방향으로 300m정도 가다보면 나오는 구례 봉서리 고인돌이다. 거북형상을 한 고인돌은 당시 선조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수와 치병을 위한 거북신앙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네 선조들은 고인돌을 훼손하는 일은 자신과 자손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수천년간 고인돌은 자연보존의 파수꾼 역할도 톡톡히 한 셈이다.

   
 
▲ 사천 본촌리 유적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돼 훼손없이 잘 보존

지리산과는 거리상 좀 떨어져 있지만 최근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고인돌의 무덤형태가 있다.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사천 이금동, 김해 장유 율하 고인돌이다. 이 무덤은 거대한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덤 한 변 길이가 50m에 이르고 거대한 장방형 묘역을 석축을 쌓아 돌렸다. 그 가운데 무덤방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혈연집단보다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출연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사천 남강댐 본촌리 돌널(무덤)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발견(1995~99년 대평리 유적)됐다. 당시 죽은 이를 널 속에 안치한 후 다른 사람의 치아를 뽑아 넣어준 장송의례 즉, 복상발치가 행해졌던 것이다. 목이 잘린 인골도 남강댐 옥방에서 확인됐다. 목이 잘린 사람은 전쟁희생자, 개인 항쟁 행위자, 부정한 죄를 지어 참수를 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인돌,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고인돌은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뿐만 아니라 선사인들의 피땀과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다.
지리산과는 거리상 좀 떨어져 있지만 최근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고인돌의 무덤형태가 있다.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사천 이금동, 김해 장유 율하 고인돌이다. 이 무덤은 거대한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덤 한 변 길이가 50m에 이르고 거대한 장방형 묘역을 석축을 쌓아 돌렸다. 그 가운데 무덤방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혈연집단보다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출연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한편 사천 남강댐 본촌리 돌널(무덤)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발견(1995~99년 대평리 유적)됐다. 당시 죽은 이를 널 속에 안치한 후 다른 사람의 치아를 뽑아 넣어준 장송의례 즉, 복상발치가 행해졌던 것이다. 목이 잘린 인골도 남강댐 옥방에서 확인됐다. 목이 잘린 사람은 전쟁희생자, 개인 항쟁 행위자, 부정한 죄를 지어 참수를 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인돌,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고인돌은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뿐만 아니라 선사인들의 피땀과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다.
도움말·사진제공/이영문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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