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11)지리산 사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56 | 2,398 | 0

본문

역사 속의 지리산(8)지리산 답사
희미해진 산 등진 사찰 오색빛깔 매력 발하고


지리산 좋아하는 등산객들은 비가 오면 짐을 싼다. 비가 그친 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풍경은 지리산만 가지고 있는 매력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사찰이다. 안개로 희미해진 산을 등지고 있어 사찰의 오색빛이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비가 자욱이 내리던 지난 22일 지리산 자락을 따라 역사가 잘 남아있는 사찰을 찾았다. 조선시대 불교의 핍박이 담긴 선암사, 통일신라시대 한 인물의 효가 서려있는 화엄사, 의병항쟁 당시 피의 역사를 전하는 연곡사다.

  190527-2-152135.jpg  ▲ 선암사 하마비.△선암사-고귀한 멋 속에 숨은 조선의 역사 = 전남 순천 조계산에 있는 선암사는 아기자기한 멋이 돋보이는 천년고찰이다. 5월 매화꽃 길을 따라 곳곳에 숨어있는 10여 개가 넘는 건물들을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신선이 된 듯하다. 하지만 선암사의 역사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 화려함 속에는 조선시대 핍박받았던 불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찰은 양반들이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자 수탈의 대상이었다. 사찰에 다다르기 전‘하마비’라 적힌 비석이 나타난다.‘말에서 내려라’는 의미의 이 비석이 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사찰은 양반들의 핍박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마비’의 의미는 ‘양반들아, 입구에 있는 강선루에서 풍류만 즐기고 가라’는 승려들의 간곡한 부탁이 담겨있는 셈이다.

‘양반아, 괴롭히지 말고 놀다만 가라’

사찰 입구에 있는 현판.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선암사 입구 현판에 적혀있는 한자 한자는 선암사 역사의 결정체다. ‘고청양산해천사’라 적혀있다. 해발 844m 조계산에 있는 선암사에 바다‘해’자가 웬 말인가.
선암사는 6번이나 화재가 났던 곳이다. 이곳 스님들은 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 ‘해천’이라는 뜻은 하천이 바닷물이 되어 불을 꺼 달라는 스님들의 간절한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시대 핍박 속에서도 선암사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있었다.
대웅전에는 세도정치 권력자인 김조순의 조카가 쓴 글이 있고 화려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원통전은 김조순 일가가 놀던 곳이다. 왕에 버금가는 세력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나마 선암사의 고귀한 멋이 지금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190527-2-152136.jpg  ▲ 화엄사 사사자석탑.△화엄사-창건자 연기조사의 뜻이 담긴 곳 = 화엄사는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진실이 보이는 사찰이다. 사찰에 들어선 후 멀리서 전체를 보면 오른쪽으로 대웅전이, 정면으로는 각황전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찬찬히 보면 각황전이 석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반면 대웅전은 높은 석축 위에 축조돼 있다. 계단도 각황전보다 대웅전이 규모가 크다. 이유인 즉, 가장 중심이 돼야할 대웅전이 시선의 오른쪽에 있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효대로 이어지는 각황전 뒤쪽의 계단길은 송림으로 둘러싸여 퍽 운치 있다. 그 길의 끝에는 이 절의 창시자인 연기조사의 효심이 담긴 사사자 석탑이 기다리고 있다.

4개의 사자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국보 제 34호 화엄사 사사자 석탑.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양대 이형석탑으로 불린다. 사사자 석탑 옆에는 인물상이 들어가 있는 석등 1기가 있다.

어머니 명복 비는 애틋한 마음

사사자 석탑에 서서 오른쪽 사자를 중심으로 서서 석등을 향해 보면 석등이 사사자 석탑을 향해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듯하다. 사사자 석탑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고 석등아래 있는 인물은 연기조사다.
그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효심탑인 것이다. 석등이 보이는 사사자 석탑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보자. 사자가 서서히 입을 벌리고 사자 아래 있는 비천상은 장구를 치고 악기를 연주하고 피리를 불고있다. 석등아래 연기대사가 어머니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1400년 전 통일신라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석탑하나로 그 당시 분위기를 재현해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190527-2-152138.jpg  
▲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사진에는 없지만 왼쪽으로 각황전이 있다.
날이 저물 때면 지는 해가 석등을 뚫고 나와 사사자 석탑을 더 환하게 비춘다.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나보다. 이 곳은 교종과 선종이 격렬하게 대치해 평탄한 날이 없었던 고려말, 승려이자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나라를 걱정하며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하루종일 /거닐면서/과거사/생각하니/날 저문/효대에/슬픈 바람/이는구나.’

△연곡사-피의 역사가 서린 곳 = 화엄사를 떠나 30분쯤 가면 지리산 피아골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밤나무 꽃향이 코끝을 스친다. 정유재란때 왜적 400여명이 하동·악양을 거쳐 이곳을 비롯해 쌍계사·칠불사에 난입해 모두 파괴했다. 연곡사를 중창한 이는 소요태능. 왕실의 신주목을 봉납했던 곳으로 신주목의 재료였던 밤나무가 유난히 많은 이유다.

  190527-2-152137.jpg  ▲ 연곡사 고관순 비석.행동하지 못한 초야 시인의 회한

피의 역사가 묻어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찰에서 느낄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연곡사 기슭에는 고관순의 비석이 있다. 과연 고관순은 누구일까. 게릴라식으로 의병항쟁을 하던 고관순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연곡사에 본 기지를 두고 활약한다.
그가 찾아간 사람이 매천 황현. 그는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써달라 부탁하지만 황현이 거절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관순이 일본 손에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남쪽 초야의 한 시인이 목숨을 끊었다. 매천 황현이다. 왜 그는 고관순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까.

매천 황현은 황희정승의 후손으로 <매천야록>을 남겼다. 지방출신이라는 이유로 장원급제하지만 대우를 받지 못하자 구례에서 움막을 짓고 후진을 양성한다. 대한매일신문 등을 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고 이완용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비롯해 일제만행 뒷이야기를 하나하나 남긴 것이 <매천야록>이다.

생각은 깨어 있었지만 의병으로 나서진 못했다. 고관순이 격문을 써달라 했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한번 더 마음을 먹고 다음날 격문을 써주겠다며 고관순을 찾았다. 하지만 때는 늦어 고관순을 비롯해 의병항쟁자들이 싸늘한 시체가 돼 연곡사를 뒹굴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몇 번 자결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매천사 뒷마당 저수지에서 맷돌을 짊어지고 자결한다. 연곡사 뒷산 곳곳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부도양식은 다 있다. 그리고 끝 길에 고관순 비가 나무에 가려진 채 가는 이들을 아쉽게 보내고 있다.

도움말/김정현(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