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01)지리산의 자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46 | 1,749 | 0

본문

 한국 역사와 문화를 움직인 ‘찬란한 동력’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 오른다. 지혜로운 자 물을 즐기고 인자한 자 산을 즐긴다 했다. 제 아무리 세상 이치를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장엄한 운해 앞에 서면 고개가 숙여지고 칼날 같은 설원에 닿으면 숙연해진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지리산을 찾고 즐기는 이유가 아닐까.

특히 지리산은 예부터 북방의 백두산과 함께 어머니같은 포용력과 의연한 자태로 사대부들의 경외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으니, 옛 사람들도 분명 지리산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도내 역사 속에 지리산은 어떻게 담겨 있을까? 국립진주박물관과 함께 20회에 걸쳐 예부터 영산으로 불리던‘역사 속의 지리산’을 들춰본다. ‘지리산의 자취’를 시작으로 지리산의 사계·차·새 등 생태에서부터 고인돌·선사·가야문화·불교사상·지리산 전설과 민담·도교 불교사상·지리산이 키워낸 약용식물 등 문화까지 도내 역사 속에 녹아있는 지리산을 따라가 본다.

   
 
 
유명한 등산코스나 여름철 피서지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지리산. 하지만 지리산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축소판이다. 지리산은 민간신앙에서 불교, 유교까지 한국 사상의 산실이며 임진왜란 때는 남명의 문인들이 의병활동을 펼친 저항과 혁신의 보루였다.

△ 한국 사상의 산실 지리산

신라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으로 받아들여지며 일찍부터 성산으로 숭배된 지리산은 한국 성모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 왕건의 비인 위숙왕후로 상징되었다.

불교의 전래로 성모신앙으로 상징되는 지리산의 민간신앙은 불교에 융합돼 간다. 토착신앙과 관련된 석장승이 지리산 사찰 입구에 유독 많이 서 있는 것이 그 같은 사실을 대변한다.

   
 
▲ 신라말<불교 + 유교>-최치원
 
신라말기,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885년 귀국한 최치원. 그가 등장하면서 지리산 불교와 유교가 만나는 정점이 된다. 최치원은 894년 신라말기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하고 쌍계사에 머물렀다. 그는 유학과 더불어 교·선을 아우른 불교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화엄승려인 의상과 법장의 전기를 쓰고 쌍계사를 창건한 선종 승려 혜소의 비문을 쓰게 된다.

지리산 지역은 고려에 들어서 다시 불교계의 중심지가 된다.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함께 참선을 통해 불도를 터득하는 선종이 번성하던 때 대각국사 의천은 교종의 천태종을 세운다. 순천에 있는 선암사가 바로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곳이다.

    ▲ 삼국시대 <성모신앙 + 불교>-지리산 석장승 성모신앙의 모태…산길 따라 불교와 유학 교류

1170년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종은 탄압을 받고 선종불교가 대두된다. 보조국사 지눌은 신앙결사인 수선사를 중심으로 지리산 자락인 송광사에서 조계종을 개창하게 된다. 또한 지리산은 몽골의 침입으로 국난을 당했을 때 호국불교의 상징으로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진주는 최씨 무인정권과 인연이 깊다. 최우의 큰아들 만종이 출가한 곳이 산청의 단속사인데 조계종이 지리산에서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최씨 무인정권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다’는 삼홍시로 지리산 단풍의 화려함을 노래한 바 있는 실천 유학의 대가 남명 조식 선생. 그가 조선시대에 등장하면서 지리산은 우리나라 유학본산 중 한곳으로 자리잡게 된다. 남명에 앞서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사림의 싹을 길렀고 여기서 정여창·김일손이 도학과 문장 절의로 이름났는데 남명이 이를 이어 집대성한다. 61세에 산청에 둥지를 튼 그는 지리산에 전승돼 온 불교사상을 아우르며 실천적 유학사상을 성립시킨다.

    ▲ 조선시대<불교 + 실천적 유교>-함양 남명조식선생상 △ 저항과 혁신의 보루, 지리산

근대에 들어와 외침과 변혁의 시기를 맞으며 지리산은 저항과 혁신의 역사적 현장이 된다. 지리산을 둘러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항쟁과 의병활동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외침과 변혁의 시기 영·호남이 연대했던 곳

1840년대 진주는 농민층 내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계층분화가 극심했고 많은 농민들이 빈궁에 허덕였다.

   
 
▲ 고려 무인정권 <불교중심지>-산청 단속사
 
1846년 진주 나동리의 경우 약 6%의 토지소유자가 44%의 농지를 소유했으며,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18%의 농지를 소유했다. 또한 경영상의 분화도 극심해 1845년 가서리의 경우 1결 이상 경작하는 부농은 3.6%이며, 이들의 경작면적은 29.6%에 달했다.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진주농민들은 한층 더 궁핍해졌다. 관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하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은 극도로 분노한다.

1861년 산청 단성에서 단성민란이 일어나고 진주농민항쟁이 이를 잇는다. 류계춘 선생이 이끈 진주농민항쟁(1862)은 19세기 초반이래 전국 각처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던 소규모의 농민항쟁을 총결산하는 동시에 이를 전국규모로 확대하는 신호탄이었다.

지리산은 한말 의병 전쟁때 영·호남 의병의 장기항전 기지로도 부상한다. 중부 이북지역의 의병들이 해외의 간도나 연해주로 망명갈 때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에게 지리산은 의병항쟁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것이다.

산길을 따라 불교와 유학이 교류하고 변혁의 시기에는 영·호남이 연대했던 곳, 지리산. 지리산 자락 800리는 하나의 생활권인 동시에 문화권이었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도움말/정만조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